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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희한한 나라로 변한 한국

#. 희한한 나라로 변한 한국    “희한하다”란 낱말의 뜻을 사전에서 보니까 “매우 드물거나 신기하다”라고 했다.  현직 대학 교수로 아세아연구원장직을 겸임하고 있어서 해마다 아세아권 대학 출장으로 한국을 자주 드나들고 있다. COVID19 확산으로 대외 출입은커녕 식당 음식 배달도 안 해 먹던 내가 3년 만에 한국과 일본 대학을 둘러보고 왔다.   750만 재외 한인 동포들이 전 세계서 지켜보고 있는 서울 광화문 광장은 매일 같이 무슨 무슨 부대가 등장하는, 쌈박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만이 아닌 이제는 체념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반도는 남북으로만 갈린 것이 아니라 남한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사건도 그렇거니와 오늘의 서울 대한민국은 온통 희한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참으로 관용과 배려, 질서가 없는 “희한한 나라 한국”으로 이미 변했다.   성경에서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서 정죄 할 것을 요청한 무리들에게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이 하나씩 뒤로 물러서 떠나 버리자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나.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일렀다.   관훈클럽 기자 질문에 대답하는 윤석열 대통령을 보면서 뚝심 있고 소신 있는 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검사 시절에 대한 혹평도 있지만 한국 사회가 만들어주었던 일이지 어떤 특정인이 부정직해서는 아니지 않았던가?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긴 것도 많은 한국 국민들의 헐뜯기 대상에 올라 있지만 이번 임기가 끝나고 다음 대통령이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다수가 준 표로 당선한 대통령이 임기를 잘 마치도록 협력하는 것이 참 민주국민이고 참 민주국회인 것이다.   주로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일을 봤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깊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서울 안암동 한 대학서 일을 끝내고, 약속된 국회의사당 강연을 준비하려고 랩톱을 꺼냈으나 와이파이가 열리지 않았다. 무작정 한 학생에게 도와 달라고 했더니 단번에 해결해주었다. 전철을 탈 때도 툭 하면 모르는 아무 젊은이에게 길을 물어도 바쁜 걸음을 멈추고서 인터넷을 열어 신속하고 정확하게 길 안내를 해주고 갔다.     20년 전부터 싸가지 없는 한국의 젊은이들이라고 단정했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보라! 한국 젊은이들의 심각한 얼굴 표정은 뭔가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의 숨 가쁘게 바쁜 걸음, 움직임들은 무엇인가를 뒷받침하고 일궈낼 것이다.     오늘의 서울 광화문 광장은 서로 헐뜯는 온통 진통의 광장으로 변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희한한 나라 한국”이 10년 안팎에 아세아권만이 아닌 전 세계를 또다시 놀랍게 할 잠재적 의식이 그들 젊은이들 마음 속 깊이 잠재하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희한한 나라 통일된 한국”을 도래케 할 것이다. 나는 믿는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21세기 세계서 한국이 관용과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살며(Together & Share) 가치 있는 사회(Value Society)를 이룩할 때 정말 잘사는 나라로 우뚝 설 것이다.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고 관용과 배려가 있는 정직한 개인, 정직한 가정, 정직한 사회, 정직한 국가가 된다면 잘 산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발전은 진통의 변화(Expanded Change)가 있어야 한다. 진통의 변화는 조화로울(Harmonize) 때 더 큰 힘이 된다. 모두가 함께, 관용과 정직한(Tolerant, Consideratin & Honest Society) 가치 있는 사회를 이룩한다면 21세기 전 세계는 이념 전쟁(Ideological War)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한 울타리 안에서 풍요롭게 잘 사는 이웃으로 변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진보파 보수파 적색파 분쟁으로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닌 남북이 잘 살자파로 통합된 큰 변화 있어야 할 때다. 한국정부는 당장 광화문 광장을 폐쇄해야 한다. 북한은 19세기 이념 통일의 망상을 버리고, 21세기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남북한 경제대국 경제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할 것이다. 서광하 캠벌스빌 대학 교수(국제정치학, 법사회학)   서광하독자 기고 나라 한국 나라 한국 한국 젊은이들 한국 사회

2023-02-01

[독자 기고] 오(조)봉완 사도 세자의 죽음

지난 달에 중앙일보에 쓴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고’는 정조의 연모가 주제였다. 정조를 언급하면서 어떻게 그의 부친 사도세자에 대하여 묵인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조선(1392-1910) 역사 중, 명성 황후(1851-1895) 시해 사건 외 제일 애절하게 생각하는 일이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정조대왕(명, 산; 1752-1800; 통치, 1776-1800)은 11살 때 아버지(사도세자; 장조; 명, 선; 1735-1762)가 잔인한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존경하며 애총 받던 할아버지 영조대왕(1694-1776)의 어명에 의해서 아버지가 죽게 되었으니,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가끔 생각한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하나 원인은 모를 수 있겠다고도 짐작한다.     그는 부친이 타계한 직후 11살짜리의 친필로 부친에게 효도할 것을 맹세한다. 성인이 되어 즉위한 후, 어렸을 때의 맹세를 수행한다. 조선조 역사상 드문 대공사로 수원에 거대한 화성을 짖고 한강에 80척의 배를 이어 임시 다리를 놓고, 아버지의 유골을 이장한다. 이것은 유명한 능행도로 역력히 보여 주고 있다. 세손인 이산은 “죄인의 아들”이라고 모욕을 당하며, 그의 정통성에 협박 당하고, 즉위 가능성에도 도전 당한다. 하나, 젊은 세손은 아버지를 옹호하며, 자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서슴치 않고 공개한다.     사도세자는 영조 대왕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둘째 아들로 영조가 42세인 1735년에 창경궁에서 부왕이 친히 출산 장면을 지켜보던 중 태어났다.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영조는 둘째 아들을 많이 기다렸었다. 선이라 이름 짓고, 생후 1년 만에 원자로 책봉했으며 그의 영특함을 기뻐하고 총애했다. 영조 25년(1749)에는 15살인 선을 대리청정까지 시켰으나, 영조의 아들에 대한 호감은 지속되지 못했다.     전통적 세자 교육이 깊어 가면서, 선의 재능은 전통적 유교 정전과 조선조 경전 외에 있었다. 그는 어쩌면, 시대에 앞선 사람인지 모른다. 그의 생각은 경화된 기존 사상 밖에 치중했다. 경전 공부보다는, 불법인 서민 작의 언문으로 쓰인 책을 모아 서고를 마련하고 일반인에게 빌려주는 일을 스스로 했고,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해, 부친 영조의 분노와 책망이 끝이지 않았다. 당시 득세 했던 노론 정치인들은 왕세자를 비판하고 폐위시키려는 노력에 몰두했다. 성숙 과정에 있던 세자는 자기의 분노를 억누르다 견디지 못하면 폭발하고 살인을 포함한 폭행을 자주 범한다. 이로 인하여 세자가 광증에 걸렸다는 소문이 난다. 그의 부인이며,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도 이것을 인정한다.     영조의 의심을 심각하게 한 것은 왕세자 선은 무기 향상에 관심이 있었다.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을 엮었다. 후에 그의 아들 정조대왕에게 도움이 됐다는 책인데 문과에 치중한 부친 영조의 호감을 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의 무기에 대한 관심은 노론 정치인의 왜곡으로 왕에게 보고돼 의심을 사고, 역모로 간주된다. 부자 관계는 악화되어 영조의 아들에 대한 학대는 심해지고, 아들의 부친에 대한 공포는 늘어 나 두 사람은 대면을 안 한다.     결국, 왕세자 이선은 극도의 광증, 부자 관계의 악화, 당쟁의 격화 등 여러 가지 상황의 종합으로 1762에 27세라는 젊은 나이로 부친의 명으로 뒤주에 갇히게 된다. 영조는 왕족의 피를 흘리게 하면 안 된다는 전통을 지키려고 질식하여 죽이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그는 8일 후, 7월 12일 삼복 여름에 뒤주 안에서 죽는다. 11살의 그의 아들, 세손 산은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몰래 물을 가지고 가나, 들키고 금지 당한다. 그 아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하염없이 울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학 박사, 조지타운대학 명예교수(은퇴)]     오(조)봉완독자 기고 사도 세자 부친 사도세자 할아버지 영조대왕 부친 영조

2022-02-18

[독자 기고] M 비자를 통한 미국 영주의 길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나 기회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한국이 아닌 타국, 그것도 아직은 가장 강력한 나라인 미국에서 일해보는 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다.     미국에 오거나, 미국 내에 적법하게 체류하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요하다. 뷰티 비즈니스 계통에 관심이 있거나, 앞으로 이쪽으로 커리어를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M 비자이다.   M 비자는 흔히 알고 있는 학생비자인 F 비자와 쌍벽을 이루는 제도이다. 두 가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학생비자이다. 그런데 F 비자는 일반 아카데믹 스쿨에서 수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M 비자는 기술학교에서 수학하려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기술학교에는 요리학교, 비행학교, 미용학교 등이 포함된다. 변호사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비자발급 가능성은 F 비자에 비해 M 비자가 훨씬 빠르고 쉽다 한다.   M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로부터 인가된 학교로부터 I-20라는 입학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학교의 모집요강에 따라 결격사유가 없는 한, 한국 내에서도 지원이 가능하다. I-20와 함께 미 대사관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은행잔고 증명, 재정보증서, 학업계획 등)을 제출한 후, 비자 인터뷰에 응하면 된다.     비자 인터뷰는 한국 내 미 대사관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재 미국 내에 적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경우는 이민국에서 인터뷰가 진행된다. 담당 변호사들에 의하면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확률은 미국 내에서 인터뷰를 받는 방법이 훨씬 높다고 한다.     우리학교는 2020년 10월부터 I-20를 발급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미용학교를 통해 M 비자를 받아 미국에 적법 체류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우선 미용학교에 정해진 수업연한(1500시간)동안 적법하게 미국 내에 체류할 수 있다. 만약 정해진 시간 내에 졸업을 하지 못했을 경우 두 번에 걸쳐 비자를 갱신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최대 3년을 초과할 수 없다. 만약 가족을 동반한다면, 가족에게는 M2 비자가 발급되며, 어린 자녀들은 공립학교에 취학할 수 있다.   F 비자와 마찬가지로, 미용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반드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학교 졸업 후 전문 미용살롱에 취업할 수도 있고, 살롱을 오픈할 수도 있다. 또한 뷰티업계로 진출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변호사와 함께 적법한 절차를 통해 비자변경 과정을 밟아야 한다.     미국에는 현재 미용과 뷰티 업계에 많은 한인들이 종사하고 있다. 아무리 AI가 발전한다 해도 사람의 손이 직접가야 하는 이 업계는, 현재에도 많은 종사자가 필요하고, 앞으로는 더 많은 전문인들이 필요하다. M 비자를 통해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 또한 미국 내에 체류하고 있는 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멋진 도전을 했으면 좋겠다.  이사벨라 리 (I M Beauty School 대표) 이사벨라 리독자 기고 미국 비자 비자발급 가능성 비자변경 과정 요리학교 비행학교

2022-02-04

[독자 기고] 오(조)봉완 옷소매 붉은 끝동(정조의 이야기)을 보고

MBC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시청률 17.4%로 지난 1일 막을 내렸다. 2021년 11월 12일부터 2022년 1월 1일까지 17부작이였던 이 드라마는 원작부터, 연출 감독까지 여자 작가와 예술가의 작품으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반 여성 분위기와 대조 되는 작품이다. 원작소설은 강미강 작, 극본은 정해리, 제작진은 김호영, 정지인, 송연화이며, 연출 감독은 정지인이다. 드라마 여주인공(이세영 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독립성을 내세우고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을 중요시 하여, 그의 마지막 왕(이준호 역)에 대한 유언이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아는 척 하지 말고 옷만 스쳤으면 좋겠다 하여 왕을 섬찟하게 했다.    그는 제 일품 빈이 되는 것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더 원했다. 현대 여성의 진지한 페니미스트(feminist) 이념이다. 아들 우선주의의 부모와 사회의 억압하는 규율을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구애 없는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을 현대 한국의 남자들은 못 마땅하게 여겨 데모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돌려 “남존여비”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반여성 데모를 하는 청년들의 생각이라 믿는다. 최근 최상훈 기자가 뉴욕 타임스에 보도 한 바에 의하면 자본주의 국가 중 남녀 차별이 제일 심한 곳이 한국이라고 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대왕(1752년 생, 1777-1800 통치)의 주로 연모의 이야기다.   조선 518년에는 모두 27대의 왕이 있었다. 그 중 22대 정조 대왕(이름, 산, 또는 성)을 세종대왕 다음으로 좋아할뿐 아니라, 한국 역사에 지식 있는 사람들의 공통되는 의견이다. 현대 한국인의 정조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은 수개의 극과 드라마를 연출했다. 잘 알려진 드라마로는 77부작의 “이산”이라는 제목으로, 정조 역에 이서진이 출연했고, “한성 별곡” 제목하에 안내상이 정조 역으로 나온 것도 있다.   세종대왕은 엄청난 거인으로 존경하나, 정조대왕이 된 이산은, 외람하나, 나의 아들같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산은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쌀 뒤주에 갇혀 삼복 여름에 질식해서 숨지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산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 하에 즉위 하는 과정에서 여러 난관을 경험했으나, 학자들 의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기로운 조정과 할아버지 영조(1725-1777) 의 각별한 총애, 자신의 총명과 인품으로 인하여 세손으로 책봉되었다(1759). 영조 대왕이 타계 하기 1년 전(1775)부터 국정을 다스렸으며, 다음해에 즉위하여 총 25년 간 조선의 임금으로, 기울어져가는 조선의 재생에 헌신했다. 정조의 명성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효도이다. 이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수원에 화성을 짖고 한강에 임시 다리를 놓아 아버지의 유골을 모셨다. 한국 역사에서 능행도는 유명한 그림이다.   정조의 통치 시대를 역사가들은 조선의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라 한다. 조선 왕국에 마지막 서광이 비치고 희망이 보였던 때라 한다. 이 시기에 조선의 문화가 활발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문학, 한글로 쓰여진 소설, 광해군(1608-1623) 시절의 홍길동전의 재현, 민속화의 인기, 언문(한글)의 보편화를 후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정조의 아쉬운 갑작스런 죽음(암살 소문)으로, 조선 왕조는 겉잡을 수 없이 쇠락한다. 어려서 수난을 겪어 그런지 정조는 관대하고 인정이 풍부 하였으나 결단성도 부족하지 않아, 자기 통치나 정책에 반대하여 위험을 주는 관료들은 서슴치 않고 처분했다.    그러나, 정조는 무엇보다 탕평책(당파를 없애기)을 기도하여 관료들의 상호 협조를 장려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려 노력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눈에 떠오른다. 한 노인이 선비 차림을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자기 일생 처음으로 태평 성대를 맞아 노년의 생활이 편안하다”고 실토한다. 그 선비는 정조였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인기 이유는 많다. 역사상 정조의 인기가 첫번째 이유다. 주역(이세영, 이준호)들의 뛰어난 연기, 여주인공의 미모, 남 주역의 남성스러움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 두 사람이 잘 어울리고, 유머가 있고 서로 존경하는 분위기도 드라마의 인기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학 박사, 조지타운대학 명예교수)   오(조)봉완독자 기고 옷소매 끝동 현대 한국인 드라마 여주인공 할아버지 영조

2022-01-07

[독자 기고] 주숙녀 권사합창단

권사합창단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일단 마음이 따뜻해지지요. 금방 마음자리가 환해지기까지 합니다. 인간은 늘 부족하고 자랑할 것 없는 존재라지만 기도하는 인간이라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어도 무방하리라 믿습니다. 천부당만부당 권사 직함이 대단한 직분이라든가 신앙적으로 성숙해 있다든가 인간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직 조금은 더 자기를 닦아보려고 노력하며 기도 횟수가 더 많으리라 믿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싶은 분들이 모여서 찬양 드리고 있는 단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합창은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는 뜻으로 연습부터 은혜롭습니다. 영혼의 심지를 태우며 노래하고 싶은 갈구함과 읊조림이 있습니다. 젊은 날처럼 목청껏 음이 올라갈 수 없다 해도 윤기 흐른 목소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복음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이라 합니다. 크리스천은 복음을 노래하며 중심에서부터 믿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합니다. 부름 받은 자의 사명으로 우리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카고 권사합창단은 팬데믹 기간에도 영상으로 연습을 쉬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비대면 연습을 통해서도 나름으로 반가웠고 즐거웠습니다. 노랫소리를 상오 들을 수 도 없고 소리가 합해질 수도 없으니 줄 끊어진 거문고를 타고 있는 듯 답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습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소리를 혼자 듣고 마는 연습이었지만 충분한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요. 지휘자님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은혜스러워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습했습니다. 여럿이 어울려 빚어내는 값있는 통일성을 간절히 믿었습니다. 지휘자님은 소프라노를 부르다 멧조를 부르다 알토를 부르다 합창을 이끌어가는 주자로서 목이 부을 만큼 성의를 다하여 주셨습니다. 젊은 박사님의 넘치는 에너지였습니다. 권사합창단에는 콘닥터의 젊은 열정이 발산하는 신선함이 넘치고 있습니다. 전단원이 그 열정의 여세를 좇아 노래하고 있으니까요. 찬양이 있는 곳에서 신앙은 자라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Zoom을 통하여 연습하는 동안에는 큰 성과를 욕심 부리지도 않았고 활기차다 할 수는 없었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찬양에는 또 하나의 하늘나라가 있으니까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노래하듯 말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휘두르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유일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구원의 신이라 합니다. 노래하는 순간에는 각자의 마음자리에 빛나는 기도가 각인되기도 하고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도 합니다. 팬데믹에 위축된 나날에 대한 강렬한 함성이기도 했습니다. 희망을 부르는 상징적 몸부림이라 해석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벌출송(Virtual Song)을 선보였습니다.     권사 합창단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래가 선곡되지요, 늘 웃음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천사의 땅을 거처로 하듯 축복이 넘칩니다. 중보기도가 있고 튼실한 은혜와 단합과 배려가 있습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구가하는 찬양의 가락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7월부터 여수론 교회에서 대면으로 합창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자랑스러운 권사합창단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수필가)     주숙녀독자 기고 권사합창단 주숙녀 주숙녀 권사합창단 합창 연습 권사 합창단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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